나는 부산 구포에서 태어나 7살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내가 생각나는 첫 기억은 바로 유년 시절의 구포다.
부산 구포는 시간 속에서 많은 변화를 겪은 곳이다. 1970년대의 소박하고 가난했던 구포와 지금의 발전된 구포를 비교하며 걸어보면 마치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시절의 구포, 그리고 달콤쌉쌀한 추억
1970년대의 내 기억 속 구포는 가난하고 소박한 동네였다. 굴다리 밑을 지날 때마다 풍기던 고소하고 달콤한 고구마 튀김 냄새는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굴다리 주변에는 늘 먼지와 기차 소음이 가득했고, 시장을 오가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굴다리 아래서 뛰놀고, 작은 리어카 상인들이 고구마 튀김을 팔며 사람들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철도청 말단 하역노동자로 일하셨고, 나는 여동생과 함께 둑방길을 걸으며 아버지를 기다리던 기억이 난다. 구포는 그때부터 경부선의 종점으로 하역의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구포다리는 철도와 낙동강을 연결하며 물자와 사람을 잇는 중요한 다리였고, 나에게는 아버지의 일터와 일상 속의 모험을 연결해 주는 특별한 장소였다. 먼지와 기차 소음으로 가득 찼던 그 시절의 구포는 나의 어린 시절 그 자체였다.
그 시절에는 라면 한 봉지조차 사먹기 어려워 국수를 반 섞어 끓여 먹었던 기억이 있다. 좁은 셋방에서 여섯 식구가 함께 자던 밤들, 서로의 온기로 추위를 이겨내던 그 순간들은 가난했지만 소중했다. 비록 물질적으로 부족했을지라도, 가족이 함께였기에 그 순간들은 특별하게 느껴졌다.
구포국수 이야기
구포국수는 부산 북구 구포동 일대에서 생산되는 국수로, 구포의 대표적인 명물이자 전국적으로도 유명한 브랜드이다. 구포 국수는 지명 자체로 유명 브랜드가 된 최초의 사례로, 1988년 한 공장에서 독자적인 상표 등록을 시도했으나 재판부는 구포 국수가 구포의 명물이므로 단독 사용이 불가하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후 부산에서 생산되는 대부분의 국수는 '구포국수'라는 이름으로 통용되었다.
구포는 조선 시대부터 곡물이 모여드는 곳이었고, 일제강점기부터는 제분과 제면 공장이 성업하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구포국수 생산은 6.25 전쟁 이후 피난민들이 모여들면서 시작되었다. 1959년 10월에는 20개의 국수 공장이 '구포건면생산조합'을 결성하고 상표를 등록하여 생산에 박차를 가했다. 1960~1970년대에는 구포에 국수 제면 공장이 30여 곳에 달하며, 구포국수는 부산의 대표 음식으로 자리매김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대량 생산이 가능해지면서 구포국수는 명맥만 겨우 유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포국수는 여전히 구포의 전통과 자부심을 상징하는 중요한 부분이다.
구포다리에 대한 아픈 기억
구포는 단순한 동네 이상의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한반도 최초의 1km가 넘는 다리인 구포다리(낙동장교)는 단순히 강을 건너는 구조물이 아닌, 구포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이어주는 다리였다.
구포는 본래 구한말 양산군 좌이면에 속했지만, 1906년 동래부로 편입되면서 오늘날의 구포가 형성되었다. 1912년 부산에서 3.1 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했으며, 부산 외곽에서 최초로 우체국과 극장이 세워진 곳이다.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로 성장한 구포는, 낙동강을 끼고 있어 교통과 철도가 발달할 수밖에 없는 지역이었다. 한반도 최초의 1km가 넘는 다리인 구포다리(낙동장교)가 세워진 것도 이 때문이다.
동네 사람들은 나에게 '구포다리 밑에서 주워왔다'고 말하곤 했다. 당시에는 친부모가 아니라고 생각해 서글프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동네 어른들의 가벼운 장난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 장난은 어린 내게 상처로 남았었다.
현재의 구포, 변화를 맞이하다
현재의 구포는 그때와 많이 다르다. '구포만세길 굴다리' 내부에는 LED형 액자를 설치하여 예술 작품을 전시할 수 있는 ‘Drive Thru 갤러리’가 조성되었다. 구포만세길 굴다리는 평소 차와 보행자들이 많이 다니는 공간으로, 오가는 사람들에게 일상 속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예전의 굴다리는 여전히 있지만, 구포에는 새로운 아파트 단지와 오피스텔, 편의점들이 들어서 있다. 둑방길은 이제 깔끔하게 정비되어 사람들이 산책하거나 자전거를 타기에 좋은 공간이 되었다. 예전의 삭막함은 사라지고, 가족들이 함께 모여 웃고 즐기는 모습이 가득하다. 과거의 그 고구마 튀김은 더 이상 리어카에서 찾아볼 수 없지만, 현대의 카페 디저트로 재탄생해 그 향기만큼은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구포의 문화와 역사적 명소
구포에는 구포나루터라는 중요한 물자 운송 거점이 있었다. 조선시대부터 이어져 온 이 나루터는 전국 시장 중에서도 손꼽히는 규모의 상권을 이루며, 구포시장을 형성했다. 40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구포시장은 상설시장과 5일장을 함께 운영하며 여전히 전국 최대 규모의 시장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구포은행이 지방 최초로 세워질 만큼 상업도시로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다.
구포의 역사적 명소들인 구포시장, 구포역, 구포대교, 구포동당숲, 감동진나루터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며 구포의 역사를 증언하고 있다. 구포국수, 구포재첩, 구포만세329 같은 특산물도 구포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 구포
업무차 들리게 된 구포역과 그 일대는 추억을 떠올리기에는 많이 변한 것 같았다. 기차를 기다리며 군만두로 유명하다는 구포역 앞 금룡만두를 찾았다. 금룡만두는 산동출신 화교가 1960년에 개업하여 60여 년의 전통을 가지고 있는 산동 만두 전문점이다. 금룡만두의 군만두는 육즙 가득 머금은 겉바속촉의 정석으로, 대파를 넣고 쪄낸 돼지껍질과 사태, 소꼬리 살로 만든 만두소에 강력분을 사용한 쫀득한 만두피가 특징이다. 탱글한 만두피 속에 야채와 고기가 어우러진 만두소, 고소한 기름맛의 뜨거운 군만두를 호호 불어가며 먹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구포는 많은 변화를 겪었지만, 그 안에 담긴 추억은 그대로 남아 있다. 나는 둑방길을 걸으며 과거와 현재를 번갈아 떠올린다. 어린 시절 가난한 형편 속에서도 함께했던 가족의 시간, 그리고 지금은 편안해진 마음으로 그 시절을 되돌아보며 웃을 수 있는 나. 구포는 내게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다리 같은 공간이다. 지금의 구포는 더 편안하고 밝아졌지만, 여전히 그 안에는 내가 기억하는 옛 향기가 남아 있는 듯하다.
부산 구포를 걷는 여행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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